후지바야시 에키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후지바야시 에키조는 1907년 교토부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교와 은행, 일본흥업은행 고문 변호사, 일본 법률가 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0년 최고재판소 재판관, 1976년 최고재판소 장관을 지냈다. 변호사 출신 최초의 최고재판소 장관으로, 무교회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쓰 지진제 사건에서 반대 의견을 냈으며, 록히드 사건 관련 재판에도 관여했다. 1977년 퇴임 후 변호사로 복귀했으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2007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교회주의 - 함석헌
함석헌은 평안북도 출신의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서,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며 '씨알의 소리'를 통해 '씨알사상'을 알렸고, 비폭력·민주·평화 사상으로 '한국 간디'라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 무교회주의 - 류영모
류영모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종교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유불도 기독교 사상을 융합한 '얼나'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 후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 최고재판소 장관 - 요코타 마사토시
요코타 마사토시는 1899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판사, 고등법원 판사, 지방법원장,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일본 최고재판소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 최고재판소 장관 - 다나카 고타로
다나카 고타로는 일본의 법학자이자 판사로,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상법 연구와 정치 활동을 거쳐 최고재판소 장관과 국제사법재판소 판사를 역임했으며, 1974년에 사망했다. - 일본의 변호사 - 메가타 다네타로
메가타 다네타로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법률가, 교육자로, 귀족원 의원과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 졸업 후 일본 법률 및 재정 제도 정비에 기여했고, 대한제국 재정 고문으로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여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일본 근대 교육 발전에도 공헌했으며 국제연맹 총회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다. - 일본의 변호사 - 시노다 지사쿠
시노다 지사쿠는 러일 전쟁 당시 국제법 고문으로 활동하고 한국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관직을 역임한 일본의 관료이자 법학자이다.
| 후지바야시 에키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후지바야시 에키조 |
| 원어명 | 藤林 益三 |
| 로마자 표기 | Fujibayashi Ekizō |
| 출생일 | 1907년 8월 26일 |
| 출생지 | 교토부 후나이군 고카쇼촌 다하라 |
| 사망일 | 2007년 4월 24일 |
| 사망지 | 도쿄도 이나기시 |
| 묘지 | 알 수 없음 |
| 학력 | |
| 출신 학교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
| 경력 | |
| 직업 | 변호사 |
| 종교 | 기독교 무교회주의 |
| 주요 경력 | |
| 직책 | 최고재판소 재판관 |
| 임용 | 제3차 사토 내각 |
| 임기 시작 | 1970년 7월 31일 |
| 임기 종료 | 1976년 5월 25일 |
| 직책 | 제7대 최고재판소 장관 |
| 임기 시작 | 1976년 5월 25일 |
| 임기 종료 | 1977년 8월 25일 |
| 임명 | 쇼와 천황 (미키 내각 지명) |
| 이전 | 무라카미 도모카즈 |
| 이후 | 오카하라 마사오 |
| 훈장 | |
| 훈격 | 훈1등 욱일대수장 |
2. 생애
1907년 교토부 후나이군 고카쇼촌(현 난탄시)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고치에서 실을 뽑거나 목재를 강을 통해 교토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으나 가업이 쇠퇴하였다. 3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소노베촌(현 난탄시)에 있던 삼촌의 집으로 어머니, 누나와 함께 이사했다. 이후 소노베 심상소학교, 교토 중학교, 제삼고등학교를 거쳐 1931년 도쿄 제국 대학(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변호사가 된 후 기업 법무 분야에서 활동하다 1970년 7월 최고재판소 재판관이 되었고, 1976년 5월에는 최고재판소 장관이 되었다. 변호사 출신 최고재판소 장관은 후지바야시가 유일하며, 68세 9개월에 장관에 취임한 것 역시 최고령 기록이다.
1977년 8월 최고재판소 장관에서 정년 퇴임했으며 곧 변호사로 복귀했다. 같은 해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2007년 4월 심부전으로 도쿄도 이나기시의 병원에서 향년 99세로 사망했다.
2. 1. 주요 활동 및 업적
기업 법무 변호사로서 교와 은행, 일본흥업은행 등에서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일본 법률가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사법연수소 교관, 도쿄도 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6년 2월 록히드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뒤 7월 24일 재판관 회의를 진행하며 미국측 증인의 형사 면책을 보증하는 선언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1977년 3월 23일 재판관 회의에서 1956년 2월 이래 유지되던 사법연수생의 국적 조항에 대해 국적 조항은 유지하면서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면 외국인도 상당하다고 인정된다면 채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서약서 제출 제도는 1990년에 폐지되었고 국적 조항은 2009년에 폐지되었다).2. 2. 무교회주의 신앙과 쓰 지진제 소송
독실한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자로, 매주 일요일마다 성서연구회에 참여했다. 이는 쓰 지진제 소송에도 영향을 미쳐, 쓰시가 지진제를 주최한 것은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에 위반된다며 최고재판소 장관으로서 반대 의견을 낸 이례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훗날 후지바야시는 "나의 법률가로서의 인생은 그야말로 이 판결을 위해 있는 것이었다"라고 술회하며 이 판결에 큰 의미를 부여했음을 밝혔다.2. 3. 록히드 사건과 사법연수생 국적 조항
1976년 록히드 사건이 발각된 후, 같은 해 7월 24일 최고재판소 장관으로서 재판관 회의를 주재하여 미국 측 증인의 형사 면책을 보증하는 선언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퇴관 후 "최고재판소 선언은 장관의 사법 행정이며, 증거 가치는 사건 담당 재판관이 판단한다"는 말을 남겼지만, 1995년 2월 최고재판소 판결에서는 이 형사 면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1956년 2월부터 사법연수생에게 국적 조항이 적용되었으나, 1977년 3월 23일 최고재판소 재판관 회의에서 국적 조항은 유지하되 "헌법과 법률을 준수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채용한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이후 1990년에 외국인의 서약서 제출 의무가 없어졌고, 2009년에는 국적 조항 자체가 철폐되었다.
3. 연보
- 1907년(메이지 40년) 8월 26일 - 교토부 후나이군 고카쇼촌 타하라(현재의 난탄시)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고치에서 실을 뽑거나, 목재를 강으로 교토로 운반하는 일을 했다. 가업이 쇠퇴하고 아버지가 사망하여, 3세에 소노베촌의 숙부 댁으로 어머니, 누나와 함께 맡겨졌다.
- 소노베 심상고등소, 교토 제3고등학교(후의 교토부립 야마시로고등학교), 제3고등학교를 졸업했다.
- 1931년(쇼와 6년)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 1970년(쇼와 45년) 7월 31일 - 최고재판소 판사에 취임했다.
- 1976년(쇼와 51년) 5월 25일 -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했다. 변호사 출신으로는 첫 장관이었다.
- 1977년(쇼와 52년) 8월 26일 - 최고재판소 장관을 퇴임하고, 변호사로 복귀했다. 같은 해, 훈1등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 2007년(헤이세이 19년) 4월 24일 - 심부전으로, 도쿄도 이나기시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99세.
- 그 외, 사법연수소 교관, 도쿄도 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교와 은행, 일본흥업은행 각 고문 변호사, 일본 법률가 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4. 저서
- 금융재정사정연구회 편, 《부실 채권 대책 일문일답》, 1967년
- 근대 세일즈사 , 《은행원의 법률 A·R·A·카르트, 법률의 모습, 법률의 마음》, 1968년
- 도쿄 후이 출판, 《한 법률가의 생활과 신앙》, 1978년 8월
- 도쿄 후이 출판, 《법률가의 지혜: 법·신앙·자전》, 1982년 6월
- 도쿄 후이 출판, 《후지바야시 에키조 저작집》 전 10권, 1984년~1996년
5. 참고 문헌
- 교우인사 제69판 『일본 신사록』 1986년
- 야마모토 유지 『최고재 이야기』 (일본평론사, 1994년), 강담사+α문고, 1997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